1. 비행기 납치가 쉬웠던 이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항공 여행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군 항공산업은 재빨리 민항으로 변신했다.
이때까지도 민간 여객기가 테러범에 의해 납치될 수 있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항공사와 항공 당국은 하이재킹hijacking에 대한 표준 매뉴얼이 없었고
조종사 역시 하이재킹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
1950년대 초반까지 공항 터미널은 기차역과 비슷한 구조였다.
승객들은 티켓을 구입한 후 비행기가 서 있는 활주로까지 걸어서 탑승했다.
공항과 항공사는 승객 소지품은 물론 신분증조차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나 무기를 숨기고 탑승해 하이재킹을 시도할 수 있었다.
2. 하이재킹의 황금 시대
1960년대의 고전적 하이재킹은 승객의 불편을 초래하기는 했지만
테러범들이 승객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60~70년대 대중에게 하이재킹은 테러라기보다는
'외로운 정치 혁명가와의 우연한 동행'이었다.
당시 북미의 하이재커들은 비행기 납치 후 대부분 최종 목적지로 쿠바를 선택했다.
쿠바는 미국과의 정치외교적 접촉을 원천 봉쇄했기 때문에
일반 쿠바에 내리기만 하면 미국으로 송환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종실을 장악한 테러범이 기내 방송으로
'이 비행기는 우리가 접수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을 쿠바로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이재킹을 선언하면, 승객들은 쿠바산 시가나 납치범들의 요구 조건을 주제로 잡담을 나누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말 그대로 하이재킹의 황금시대였다.
하이재킹이 발생하는 배경에는 남미의 공산혁명과 중동의 오랜 민족분쟁이 있었다.
조직적으로 테러 훈련을 받은 납치범들이 공중에서 아무 대비가 없는 비행기를 납치하는 것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납치하는 것보다 쉬웠다.
게다가 납치한 승객들을 인질로 동료의 석방이나 막대한 돈을 요구했고,
수백 명의 인질을 희생시킬 수 없었던 정부는 납치범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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